나의 사랑채/교리와 성지에 대하여

참회는

소확행희망 2013. 8. 7. 13:04

 

참회(懺悔)는

 

 

성스러운 일

 

참회는 잘못을 뉘우치고 허물을 고쳐 죄업을 씻어내는 성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 있는 종교가에서는 중요한 수행덕목으로 되어 왔다. 중국 우임금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큰 가뭄에 육사자책(六事自責), 여섯 가지로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비 내리기를 하늘에 빌었고 태갑(太甲)이 탕왕(蕩王)의 법도를 무너뜨려 동(桐)에 삼년간 내침을 받았을 때도 회개 자책해서 마침내 정사(政事)를 다시 맡게 되었었다.

 

부처님 당시 두 비구가 중계를 범하고 참회하기 위해 우바리에 갔으나 ‘참회불통’이라 하자 다시 유마거사를 찾아가 중계를 범하였다고 고백하니 두 비구에게 ‘죄상을 한 번 찾아와 보라’하고 일렀다. 비구가 대답하기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유마거사가 ‘이미 멸도가 되었나니라’ 하여 두 비구는 참회로써 죄의 멸도를 얻었다.

 

 

뉘우침

 

참회는 먼저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죄 없는 사람이 없고 허물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자기허물을 솔직히 시인하고 가책하고 사과하기란 어렵다. 참회란 진심으로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깨달아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이 참회다.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지혜는 훌륭한 인격이다. 대인(大人)은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안아버리는 경지이고 다음은 잘못의 책임을 자기가 깊이 느끼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허물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는 사람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거나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는 것이라 하겠다. 죄를 짓는 것도 죄가 무겁지마는 뉘우칠 줄 모르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당한 것은 더욱 무겁다.

 

참으로 허물을 뉘우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성토하지도 않고 오히려 스스로 안아버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일언의 원앙이 없었고 그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명분으로 죽어갔다. 이는 천언만어(千言萬語)의 설교보다도 더 큰 감동으로 인류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나투었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이와 같이 자기의 잘못으로만 돌린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이처럼 시끄럽지 않을뿐더러 온통 평화롭게 될 것이다.

 

 

허물 고치는 것

 

인수무과 개지위선(人誰無過 改之爲善)이라고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성인이 위대하다함은 자기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참회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침과 동시에 후과(后過)를 범하지 않기 위해 쉬임없이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요 허물을 고치고 습관을 제거해가는 것이 참회의 길이라 하겠다.

 

 

죄업 씻는 길

 

모든 성자가 인류구제의 문을 열고 참회의 길을 밝힌 것은 중생의 죄업을 씻어주기 위함이다. 현각선사(玄覺禪師)는 증도가(證道歌)에서 지지범중 장보리(只知犯重 障菩提) 다못 죄가 중하면 보리를 막는 것만 알고 불견여래 개비결(不見如來 開秘訣) 여래의 비결(참회)을 열어놓은 것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참회는 중생구제의 유일한 문이요 죄업중생들의 살아날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겁겁다생(劫劫多生)을 드나들면서 무슨 죄업을 지었는지 어떤 허물을 범했는지 모른다. 가까이 오늘 하루만 살펴보아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육근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중에 많은 업을 짓는다. 혹은 의식하면서 과오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괴롭히는 일들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이렇듯 알고도 짓고 죄짓는 줄도 모른 채 지은 죄를 참회의 길을 통해서 씻어가고 죄업의 씨앗인 무명심(無明心) 삼독심(三毒心)을 씻어가는 것이다. 현재 돌아오는 것이 낙보다는 고가 더 많은 것이 우리들의 보통 삶이다. 그것은 지난 생에 고될 일을 지었기 때문에 받는 것이므로 현재 큰 과오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과거생을 미루어 항상 참회하는 심경으로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업력 녹히는 용광로

 

참회는 죄업을 씻는 양잿물이요 업력을 녹이는 용광로다. 참회는 죄업을 쉬게 하는 방화수(防火水)와 같고 마음의 때를 씻는 비누와 같다. 그러므로 수도인이 참회 없이는 마음을 닦을 수 없고 무명을 녹일 수가 없으며 아상산(我相山)을 부술 수가 없다. 그래서 수도문중에서는 참회를 성불의 기초가 되고 견성의 첩경이 된다고 말한다. 죄업이 두터울수록 부처와의 거리는 멀어져만 가고 업력이 쌓일수록 자성의 철문이 굳게 잠긴다. 설사 견성을 했다 할지라도 착심과 업력을 일시에 녹일 수가 없고 삼대력을 얻었더라도 이미 지은 정업은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부러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힘으로 마치 자석에 딸려가듯이 자연적으로 끌려가는 이 업력의 힘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업력이란 애정으로 얽힌 애정력이요, 원한과 증오로 얽힌 원증력(怨憎力)이며 오욕으로 얽힌 무명력(無明力)으로 참회를 통해 삼대력과 자비력으로 씻어내야 한다.

 

 

참회는 진리적 근거가 있다

 

참회를 하는 것은 진리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며, 또 진리적 근거가 있어야 참회의 필요가 있고 참회의 효과도 있는 것이다. 나라법도 모법(母法)해야 하듯이 교단의 교규도 교헌에 근거해야 효과를 낸다. 헌법에 저촉이 되거나 근거가 없으면 법이 성립이 안된다. 이처럼 불교가 대법임은 진리에 근거하고 성리에 바탕하였기 때문이다. 진리는 일시적이거나 유동적인 것이 아니며 실재하고 여여하다. 또 미신이 아니라 사실이요, 확실해서 아무리 불신하고 거부해도 다가온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복을 지으면 꼭 복이 돌아오는 이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이 인과의 법이 바로 참회법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종사님께서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인과보응이 있게 된다고 하셨다. 즉 인과의 진리 자체가 극하면 변하는 원리이므로 이러한 진리에 바탕하여 지극히 참회하면 업보를 멸도 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죄를 지었을 때 상대가 보복을 하려고 해도 지극히 참회하면 보복하려던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의 원리요 업을 쉬게 하는 법칙이다. 이 진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과오를 저질렀을 때 참회하는 것이요, 이 진리에 바탕하여 근거해서 참회는 반드시 필요하며 또 효과도 있게 된다.

이처럼 인과법칙에 업보멸도가 가능한 자유의 법칙이 있음을 믿고, 참회개과하고 참회정진하여 업보를 멸도시키는 길을 밟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과의 법칙에는 필연적으로 지으면 반드시 받는 법과 자유의지로 미래를 개척해 가는 자유의 법이 있으므로 이 자유의지로서 참회를 지극히 하면 능히 업보(業報)를 멸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참회의 두 길

 

참회는 곧 죄를 녹이는 길인데, 거기에는 두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죄를 녹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불가에서도 이참과 사참으로 밝혀놓았고 대종사님께서도 이참과 사참의 두가지로 밝혀주셨다. 사참은 현실적 참회로서 실지참회요 도덕적 참회며 행위의 참회다.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과 물질, 세 방면으로 참회하는 방법이다. 안으로는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진리에게 고백하는 것이요 밖으로는 상대에게 사죄하고 모든 선을 닦아가는 것이다.

 

 

기도로 참회

 

그러기 위해 먼저 기도로서 참회한다. 법신불사은님과 제불제성님께 진심으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겁겁다생에 모르고 짓고 알면서도 삼독심에 끌려서 부질없고 철없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기를 기원하고 나아가 죄성(罪性)이 공한 인간본성의 자리에 돌아가도록 기원하며 다시는 짓지 않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하늘이 감동하고 제불제성이 용서할 때까지 눈물로 사죄하고 천배만배(千拜萬拜)라도 올려서 지극히 참회하며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생활로 참회

 

그 다음은 생활참회다. 참회하는 사람은 검소한 생활, 근면의 생활을 통하여 죄업을 씻어가고 업력을 녹여 가야 한다. 진정한 참회는 사치와 낭비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안일과 영화를 누리면서 죄업이 씻어질 리 없다. 진참회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천하의 가난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의 무지와 질병, 가난을 자기가 차지해버리는 고행 한 가지씩 감당해가는 참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로서 참회해야 한다. 죄업의 댓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진리전에 바치고 사회에다 바치는 것이다. 참회하기 위해서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혼탁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위해서 고독하고 불행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내가 아끼는 소유 한가지라도 이웃에게 베풀고 궁극에 가서는 나의 정신과 소중한 신명(身命)까지도 참회의 제물로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일은 거름을 주어야 수확할 수 있듯이 불과(佛果)는 정진과 불공이라는 영양분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선성(先聖)들은 신명을 다해 참회정진하고 참회헌공하였다. 참회봉사로 선행 한가지씩 쌓아가고 봉사 한가지라도 하는 것으로 참회하고 나아가 선을 쌓고 봉사한다는 생각마저 마음에서 비우고 선을 행하되 행한 바 없는 덕을 쌓자는 것이다.

끝으로 참회하는 사람은 법도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참회생활을 하는 것은 입이나 몸동작이 점점 발라져 가야하고 의식과 사고가 정당해야 한다. 참회는 자기감정을 억제하고 자기를 극복하는 내면의 공부와 솔성의 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로 하면 먼저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도덕적 가치기준을 확립하고 합리적 사고와 합법적 행동으로 법도 있는 정상적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믿음이 없으면 도덕적 가치기준이 희미해지고 가치기준에 혼란이 오기 때문에 규율과 법도를 무시하고 불평과 폭력으로 자행자지를 자유인 양 착각하고 솔성을 무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회는 먼저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해서 도덕적 가치기준을 세우고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교리실천, 계문준수, 솔성요론을 실천해서 법도 있고 질서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정신과 육신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육신을 길들임으로 해서 정신도 성장을 얻을 수 있고 길들여진다. 그러므로 육신을 절제하고 조복 받아야 정신을 조복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율을 제정하셨고 대종사님께서는 훈련법을 정하셨다. 또한 대산종법사님께서는 정법(正法), 정사(正師)의 훈증으로 육근을 바르게 길들여 법도 있는 생활을 하자고 하셨다. 우리는 참회하는 심경으로 계문 하나씩 지켜나가고 나쁜 습관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공부를 해서 법도 있는 생활이 되어야하며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不維求)해서 처음에는 규칙에 따라 생활을 하여 나중에는 마음을 자유자재하되 법이 되고 덕으로 덕을 다루도록 참회를 하자는 것이다.

 

 

당처에 참회

 

나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바로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당처참회이다. 나아가 사과에 그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상당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빠른 속죄의 길이다. 만일 상대방이 열반에 가까울 때에는 살아 생전에 참회를 해서 내생으로 조월이 안 되도록 하는 것이 죄가 가벼우며 만일 응하지 않을 때에는 응할 때까지 진심으로 정성을 드리며 그렇게 해서도 끝내 용서하지 않으면 진리전에 깊이 참회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이 누그러지는 감응을 얻어야 한다. 또 만일 상대방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때에는 진리전에 사과하고 참회의 마음으로 공중사업에 헌금도 하여 널리 도움을 주어야 한다.

대중과 법정에 참회한다. 수십년 전 일이다. 신도안에 잠시 요양하고 있을 때, 삼동원 곡간처럼 사용되는 방의 옆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먹을 것이 있으니 쥐들이 무시로 들락거리고 밤이면 더욱 법석을 떨었다. 그래서 멸치에 쥐약을 묻혀서 방구석 여기저기에 놓았다. 종법사님께서는 그렇게 할 경우에는 삼일 전부터 방을 놓으라고 하시므로, 쥐들이 알아듣고 멀리 달아나도록 삼일 전부터 계속해서 약 놓는다고 큰소리로 방을 놓았다. 그래서인지 죽은 쥐는 별로 없고 여전히 밤이 되면 쥐들의 법석에 곤란을 겪었다. 할 수 없이 동네에서 예쁜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와, 그 방에 넣고 쥐가 잠잠하기를 바랐다. 그랬더니, 그 고양이가 멸치를 먹었던 것 같다. 밤새 신음하다가 새벽녘에 끝내 쭉 뻗고 말았다. 설탕물을 타서 먹이고 했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고양이를 넣으면서 그 멸치 치우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나 안타깝고, 측은한지 그날 하루 기도 정진하면서 정진의 공이 고양이 영가에게 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500원을 고양이 이름으로 삼동원원장님에게 드렸다. 지금 돈으로는 5000원쯤 될 것이다. 당시 도량 내 조그만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밤이면 등불이 없어 조심스럽게 다녀야 했다. 그 돈으로 동산원장님은 그곳에다 양철로 갓을 씌우고 작은 가로등을 하나 세웠고 기둥에다 ‘고양이’라 써두었다. 그것으로 고양이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다 소멸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작은 정성이라도 바쳐 참회하였다. 작은 가로등이 밤이면 우물전 둘레를 밝히니 고양이 공덕이 그렇게라도 미치는 것이 고맙기 그지없었던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참회하는 길이 있다. 만일 대중에게 잘못을 했으면 대중에게 고백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며 용서를 빌어서 대중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에서는 비록 아무도 모르게 지은 잘못이라도 죄를 지으면 대중 앞에 나아가 고백하고 죄를 지으면 대중 앞에 나아가 고백하고 참회하며 후일에 거듭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타인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던 잘못이지만 만인에게 고백함으로써 숨김없는 진실한 참회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법정에 자수하는 것이 좋다. 타인의 고발이 있기 전에 먼저 스스로 자수하여 형을 받아버리는 것이 죄를 숨기고서 전전긍긍하며 오래 가는 것보다 심리적으로도 훨씬 벌이 가벼울 수 있다. 흑인 살인자가 30년 동안 숨어 살다가 마침내 자수를 하고 감옥을 들어가면서 오히려 웃으며 ‘이제는 편히 살겠다’고 했다는 이야기처럼 숨기면 숨길수록 벌은 더 무거운 것을 알 수 있다. 정산종사께서 죄는 드러낼수록 가볍고 선은 숨길수록 그 공덕이 커진다고 하셨다. 죄는 숨겨두면 스스로 마음으로 짊어지는 불만까지 겹쳐 벌이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이참은 진리참회

 

이참은 잘못에 대한 근원적인 참회로서 진리참회요 성리(性理) 참회다. 이것은 불조들의 참회로서 삼독심을 녹이고 무명과 업력을 녹이는 진참회요 대승의 참회다. 먼저 진리참회로서 생멸없는 진리와 인과 있는 진리를 진실되게 믿고 여실히 깨쳐 참회를 하는 것이다. 진리는 어떤 사람이 인증(認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작용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부를 한다고 진리가 물러나고 진리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해가 동에서 솟아 서쪽으로 지는 사실처럼 진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엄연히 존재한다. 이 진리를 확신하고 깨쳐서 남을 속이는 것이 곧 나를 속이는 것인 줄을 알아 무기심(無欺心) 무기인(無欺人) 무기천(無欺天)으로 자기마음을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하늘을 속이지 않는 진실 된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거짓없고 계교없이 진심으로 천심(天心)으로 천연심(天然心)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정업남면(定業難免)이라, 한 번 지은 업은 이미 면할 수 없으므로 모든 잘못된 전날의 업보에 대하여서는 원망하는 마음을 두거나 불안한 마음을 두지 말고, 자신의 업이 돌아오는 것으로 알아 차분하게 받아 드리며 깊이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용서를 비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과가 있으므로 과보가 돌아오고, 인과가 있으므로 참회 속죄하여 업보를 멸도시킬 수 있으므로 참회 속죄하여 업보를 멸도시킬 수 있음에 안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진심으로 감수불보함으로써 참회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흔히 인과의 필연적인 면만 알아 한번 잘못을 저지르면 그 과보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절망하여 자포자기해서 타락하기 쉽고 숙명적으로 멀어지고 만다. 그러나 인과의 자유법칙이 있음을 믿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말해서 일단 겁겁다생을 드나들면서 육근을 움직이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죄업을 지었을 것이다. 그 결과 호리도 틀림이 없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돌아오는 과보에 대해서는 안분하되 한편으로는 분연히 미래를 개척하는 용기와 투지를 가지고 참회하는 것이 인과를 참되게 믿는 길이요, 용기있게 미래를 개척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설사 억울한 일이나 시비를 받더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누구 때문이라도 탓하지 말고 또 거부하지도 말고 회피하려고 몸부림치지도 말고 변명하거나 옹색한 핑계를 대려고도 말고 오직 진실된 참회로써 임해야 하며 달게 받는 것이 유일한 최선의 길이다. 한탄하거나 보복하려고도 말고 오직 스스로 가슴속에서 아픔으로 말없이 소리없이 녹여버려야 비로소 업이 쉬어버리는 것이다. 전일의 자기,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전생의 자기를 회고함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 일어나는 일들을 오직 이생의 일로만 알고 고통의 원인을 자기에게 두지 않고 남에게 돌리기 쉽고 보복하기도 쉽다. 그렇게 되면 참다운 진참회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업보를 소멸하는 수도 없는 것이다. 참회인은 넘치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절망하여 타락하지도 아니하며 그렇다고 오직 안분(安分)하고 해탈하는 것이요, 미래를 개척하는데 용기를 갖고 노력할 뿐이다. 진리참회는 진리를 믿는데서 시작하여 진리를 깨달아 업장을 깨끗이 녹여내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겠다.

 

 

이참은 정진 참회

 

수도가 곧 참회요, 참회가 곧 정진이다. 정진하고 죄 지을 수 없고 정진하고 죄업이 안 씻어질 수 없다. 진정으로 참회하는 사람은 정진을 게을리 할 수도 없다. 참회정진으로 마음의 세 가지 큰 힘을 길러야 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능히 무명을 녹이고 죄업을 멸도할 수 있다. 지어놓은 업보는 가시철망으로도 막을 수 없고 아무리 높은 성을 쌓는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업보는 어느 옥관자(玉冠子)라도 두려워않고 천하의 제일 가는 웅변으로도 달랠 수가 없다. 오직 한 가지 길은 참회정진으로 일심청정하면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숙업(宿業)을 자멸시킬 수 있으며 삼독심은 단전토굴에서만 녹일 수 있다. 다시말해서 청정한 지혜는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염불삼매에 들고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고 주송삼매(呪誦三昧)에 들어서 죄복이 돈공한 그 자리에 단전토굴에 들어야 그 힘으로 죄업의 씨앗인 무명을 녹이고 삼독심을 녹일 수 있는 것이다. 참회정진하여 움직이고 멈추는 찰라찰라가 언제나 선(禪)이 되고 발길 이르는 곳마다 선도량이 되어서 자성이 매(昧)하지 않아야 동정 간 자성을 떠나지 않고 삼업(三業)이 청정하여 자성을 비쳐 볼 지혜가 솟는다. 참회정진으로 삼대력을 길러야 습관과 감정과 업력에 끌리지 않는 힘이 생기며 좋은 경계가 돌아오거나 궂은 경계가 돌아오더라도 능히 조절하고 부려 쓰는 힘이 생기는 것이요, 참회정진으로 삼대력을 얻어야 자성불을 깨쳐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참회정진해야 선악을 초월하고 죄복을 자유하고 일체 상극인연을 상생으로 돌려 대자비의 덕을 나투게 되는 것이다. 곧 자성청정으로 두터운 우리들의 죄업을 청정히 하자는 것이요 선력의 바다에서 무명과 업력을 녹이자는 것이다.

 

 

이참은 자성(自性) 참회

 

설사 참회를 해도 죄업의 근본인 삼독심은 그대로 남아있고 무명이 녹지 않으면 다시 악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죄업이 또한 소멸되어지지 않는다. 대종사님께서 참회문에 밝히시기를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진다고 하셨다. 죄성(罪性)이 돈공(頓空)한 자성(自性), 선악과 죄복이 텅 빈 성리에 바탕을 한 참회라야 비로소 무명과 죄업을 완전히 녹일 수가 있다. 즉 죄성이 돈공한 자성을 비추어 삼독오욕을 녹이는 것이다. 아뢰야식 곧 함장식에 저장되어 있는 인(因) 곧 업식(業識)을 녹이자는 것이며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 잠재하여 있는 죄의식을 녹여내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성관조가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진정한 참회기도와 오랜 참회생활을 통하여 모든 곳에 참회하기를 성심으로 하고 진리를 착실히 믿고 깨달아서 진리로 참회하고 참회정진으로 염불과 선을 착실히 해야 비로소 자성을 비쳐볼 빛이 자기안에서 솟는다. 그 빛이 솟아야 능히 자성참회를 이룰 수 있다. 자성참회는 묵묵히 자기성품을 비추어보는 관조요 회광반조하는 것이다. 묵이관조(默而觀照)로써 항상 고요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선과 악 또 죄와 복, 이 모든 것이 다 끊어지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본래 그대로의 자기 성품을 고요히 비추어야 비로소 심월(心月)이 솟고 성월(性月), 혜월(慧月)이 솟아 자성의 지혜광명이 드러나고 이 지혜의 빛이 드러나야 청정한 본래심(本來心)을 가리는 무명흑운이 걷히게 된다. 자성참회는 자성을 비추어봄으로써 업을 녹이는 것이요 자성의 지혜광명으로 무명을 녹이는 것이다.

 

 

참회로써 삼매(三昧)를

 

참회하면서 일체를 공부일념으로 대하고 불공일념으로 삼아서 불리자성의 대공(大功)을 이루는 것이요, 응용무념의 대덕을 나투는 것이다. 오직 참회하는 한마음으로 세상에 물들고 타락함이 없이 진리에 합하고 법에 합하여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행을 하는 것이다. 이참과 사참으로 부지런히 참회생활을 해서 죄업을 멸도시키고 숙업을 청산하여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매달려 살지 말고 고락이 없고 천당과 지옥이 따로 없는 원적무별한 이치를 알아서 사바세계를 정토극락으로 화하게 하고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대지가 바로 선도량으로 화하게 하며 동정역순을 모두 삼매로 이루는 것이다. 참회하고 또 참회해서 내속에 스스로 이미 완벽하게 갖춰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깨쳐서 마음의 속박을 끊고 자유를 얻어 천업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하며 육도윤회를 자유하고 일체 죄복을 자유하는 대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참회로써 하는 일마다 복이 되고 만나는 인연마다 서로 도우고 서로 살리는 좋은 인연이 되어서 선악과 죄복을 초월해서 오직 크고 깊은 대자대비심으로 고해에서 허덕이는 일체생령을 위해 바치되 자신이 해(害)를 차지하는 지선(至善)의 성자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명념해야 할 것은 대종사님께서 참회문에 밝히신 말씀으로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無碍行)이라 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 또는 견성만으로서 공부를 다 한 줄로 알고, 견성 후에도 참회도 소용이 없고 수행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비록 견성은 하였다 할지라도 천만 번뇌와 모든 착심이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성불을 하였다 할지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점에 주의하여 사견(邪見)에 빠지지 말며 불조의 말씀을 오해하여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지니라.” 그리고 보적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깊이 명념하여야 할 것이다. “미륵이여, 오는 세상 마지막 5백세에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난 보살들이 생각하기를 ⎾부처님 설법에 따르면 능히 모든 죄를 제한다⏌하고는 더욱 많은 죄악을 짓고, 지은 뒤엔 ⎾참회하리라⏌한다 하셨다. 참회를 하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실다운 참회가 아니다. 참회를 능사로 알아서 참회 후에 거듭 잘못을 저지르면 참회의 효과가 없다.

참회 후에는 반드시 각고의 수행정진이 따라야 다시는 되풀이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되고 참다운 참회, 진정한 참회가 되는 것이다. 참회하고 죄짓기를 되풀이하기가 쉬운데 참회가 능사가 아님을 깊이 명념하여 다시 거듭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참회의 생활이라 하겠다. 우리들은 사참과 이참을 통해 참회가 생활화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생활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며 나아가 미래를 개척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위 글은 예타원 전이창 종사님께서 교역자 훈련기간 중 하신 법문입니다. 부여교당 최지선교도님이 자녀들의 이름으로 헌공하여 많은 이들이 불 수 있기를 발원하여 소책자로 1990년 6월 25일 발행되어 보급한 것을 옮긴 글임.

 

 

 

 

 

참회문(懺悔文) -- 원불교 정전(正典) 수행편 제8장 

 

 음양 상승(陰陽相勝)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相生)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相克)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으되,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제불 조사가 이구 동음으로 참회문을 열어 놓으셨나니라.
대범, 참회라 하는 것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이라,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여 날로 선도를 행한즉 구업(舊業)은 점점 사라지고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와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나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되 [전심 작악(前心作惡)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과 같고 후심 기선(後心起善)은 밝은 불이 어둠을 파함과 같나니라] 하시었나니,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나니, 죄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이여! 어찌 이 문에 들지 아니하리요.
그러나,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貪嗔痴)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으며,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나니, 비하건대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冷)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갖다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그대로 둔즉 불의 힘은 강하고 냉수의 힘은 약하여 어느 때든지 그 물이 냉해지지 아니 함과 같나니라.
세상에 전과(前過)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으나 후과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적으며, 일시적 참회심으로써 한 두 가지의 복을 짓는 사람은 있으나 심중의 탐·진·치는 그대로 두나니 어찌 죄업이 청정하기를 바라리요.
참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하나는 이참(理懺)이라,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요,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니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할지니라. 이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천 겁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 지나니라.
또는,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삼계 육도(三界六途)가 평등 일미요, 동정 역순이 무비 삼매(無非三昧)라, 이러한 사람은 천만 죄고가 더운 물에 얼음 녹듯하여 고도 고가 아니요, 죄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진대지가 이 도량이요, 진대지가 이 정토라 내 외 중간에 털끝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라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하리라.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 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無碍行)이라 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 또는, 견성만으로써 공부를 다 한 줄로 알고, 견성 후에는 참회도 소용이 없고 수행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비록 견성은 하였다 할지라도 천만 번뇌와 모든 착심이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성불을 하였다 할지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점에 주의하여 사견(邪見)에 빠지지 말며 불조의 말씀을 오해하여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