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내마음의 창

나의 평판은 어떻게 결정되고 어떻게 노력해야하나?

소확행희망 2017. 6. 7. 14:21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마다 성향이 있고 다른 사람들로 부터 성격이 까칠하다, 자상하다, 호탕하다,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다. 계산적이다, 사람좋다 등 여러가지 평판이 가려지곤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평판이 형성되기 마련인데 한 사람의 평판은 때론 그 사람도 모르게 형성되기도 하고 때론 곡해되어 그 사람의 실제와 다르게 평판이 오가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에 대한 사람 됨됨이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판단된 것들이 여러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일때 그것은 평판이라 이름한다. 옛날부터 사람을 판단할 때 기준이 되었던 것이 신언서판 (身言書判)이었다. 외모나 언변 그리고 글과 판단력을 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생각해왔다. 요즘에 와서도 크게 다르진 않다고 본다. 그 사람을 판단할때는 그 사람의 용모나 언사 그리고 판단력을 보며 그 사람에 대하여 알게되고 그런 것들이 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은 결국 신구의 세가지 업의 형대로 나타나게 되고 삼업을 어떻게 잘 운영해가며 사느냐에 따라 죄를 짓기도 하고 복을 짓기도 하고 좋은 평을 듣기도 하고 나쁜 평을 듣기도 한다. 원불교에서는 모든 죄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삼업에 의하여 복도 짓고 죄도 짓는다고 보고 있다. 참회를 통하여 죄과를 뉘우치고 다시 죄과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고 모든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로 자성의 본래 마음을 회복할 때 진정한 복락의 길로 나아간다고 한다.



원불교적 의미



신구의 삼업은 복짓고 죄짓는 밭이다. 《정전》 ‘일원상 법어’에서는 “이 원상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육근(眼耳鼻舌身意六根)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이로다.”라 했다. 육근을 요약하면 신구의 삼업으로 이를 작업할 때 일원상처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솔성요론(率性要論)’과 ‘삼십계문(三十戒文)’을 두어 삼업을 청정하게 하도록 했다. 《성가》 ‘참회의 노래(내가 지은 모든 죄업)’에서는 “내가 지은 모든 죄업 생각하오니 탐심 진심 어리석음 근본이 되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었던 바라 내 이제 모두 깊이 깊이 참회합니다. 죄업이 자성에는 본래 없으나 마음따라 모든 죄가 일어났나니 그 마음 멸도되면 죄도 공한 것 모두 공한 그 자리에 그치오리다”라고 노래했다. 〈金道公〉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신구의 삼업을 통해 짓는 죄업!

나의 주변 평판은 과연 어떠할까?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나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평판이 되어 판단되어 질 것이다. 사람의 일생은 어쩌면 여러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자 하는 강한 일념으로 한 일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잘했다고 칭찬받기도 하고 때론 일을 추진하다 보면 과격하고 독단적이다고 질타를 받기도 하면서 그렇게 인생은 쉼없이 달려가고 있다. 쉴새없이 괴롭히는 반조하는 삶속에 아쉬움들에 스스로를 질책하며 괴로움에 휩싸이곤 한다. 어쩌면 비난하는 타인들보다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신이 더 나쁠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감싸고 격려해주고 일을 성취해가야할 정작 본인이 가해자가 된다고 해서야 어찌 행복한 삶이 될 수 있겠는가. 지난 일을 참회하되 같은 일을 반복하여 다시 죄를 범하는 어리석음은 짓지 말고 스스로를 격려해주자.

너는 잘 할 수 있다. 너는 잘하고 있다라고.




참회문(懺悔文) 


음양 상승(陰陽相勝)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相生)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相克)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으되,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제불 조사가 이구 동음으로 참회문을 열어 놓으셨나니라.
대범, 참회라 하는 것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이라,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여 날로 선도를 행한즉 구업(舊業)은 점점 사라지고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와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나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되 [전심 작악(前心作惡)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과 같고 후심 기선(後心起善)은 밝은 불이 어둠을 파함과 같나니라] 하시었나니,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나니, 죄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이여! 어찌 이 문에 들지 아니하리요.
그러나,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貪嗔痴)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으며,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나니, 비하건대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冷)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갖다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그대로 둔즉 불의 힘은 강하고 냉수의 힘은 약하여 어느 때든지 그 물이 냉해지지 아니 함과 같나니라.
세상에 전과(前過)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으나 후과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적으며, 일시적 참회심으로써 한 두 가지의 복을 짓는 사람은 있으나 심중의 탐·진·치는 그대로 두나니 어찌 죄업이 청정하기를 바라리요.
참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하나는 이참(理懺)이라,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요,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니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할지니라. 이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천 겁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 지나니라.
또는,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삼계 육도(三界六途)가 평등 일미요, 동정 역순이 무비 삼매(無非三昧)라, 이러한 사람은 천만 죄고가 더운 물에 얼음 녹듯하여 고도 고가 아니요, 죄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진대지가 이 도량이요, 진대지가 이 정토라 내 외 중간에 털끝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라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하리라.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 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無碍行)이라 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 또는, 견성만으로써 공부를 다 한 줄로 알고, 견성 후에는 참회도 소용이 없고 수행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비록 견성은 하였다 할지라도 천만 번뇌와 모든 착심이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성불을 하였다 할지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점에 주의하여 사견(邪見)에 빠지지 말며 불조의 말씀을 오해하여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