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채/교리와 성지에 대하여

만덕산 미륵사를 거쳐 정상을 오르다[미륵사와 원불교이야기]

소확행희망 2015. 2. 9. 11:49

동산교당산악회 2월 정기 산행으로 만덕산행 길에 나섰다.

법회가 끝나고 오후에서야 출발하는 산행인데다 쉽지않은 산행이었다.

거기다 날씨까지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칼 바람이 불었다.

손은 꽁꽁얼어서 시렵고 귀는 차갑게 아려오고 날씨가 추운 줄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추운 듯 했다.

그래도 동료들과 함께했기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산행이었다.

겨울 산행은 이렇게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보다.

마음 속에 칼 바람을 이겨내고 말겟다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사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닐런가.

 

미륵사의 유래: 미륵사는 만덕산 북쪽 8부능선 기슭에 위치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속한다. 미륵사는 원불교 만덕산훈련원에서 오도재를 넘어서 갈 수 있으며, 초선지에서는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올라 북쪽 골짜기를 따라 2km여를 내려가는 거리에 있다. 미륵사는 백제 위덕왕(554~598) 때 지명법사가 수행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의 본래 이름은 금강암이었으나 뒤에 미륵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다. 법당 뒤 자연 암반 위에 모전탑(模塼塔) 형식의 작은 탑이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묵대사가 주석할 당시 도술을 써서 동자로 하여금 돌을 날라 오게 하여 세웠다고 한다.

 

자료출처: 십이인연의 꽃자리 만덕  저자: 서문성 교무님

정산종사와 만덕산 미륵사 이야기 : 원기 6년 말, 어느 날 정산 종사는 다시 소태산 대종사의 명을 받아 새 회상 인연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소태산 대종사는 종산 종사에게 "이제 차츰 새 회상을 펼 때가 되어 간다. 어디든지 내 발걸음 닿는 대로 가 보아라. 그러면 만나야 할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다가 전주는 들리지 말라"고 일렀다. 정산 종사는 봉래정사를 떠나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기다 전주라는 말을 듣고 전주 쪽은 외면한 채 길을 재촉했다. 도중에 한 스님을 만나 길동무를 하게 됐다. 그 스님은 진안 만덕산 주지였다. 정산 종사는 스님과  미륵사에 도착하여 그 해 겨울 한 철을 나게 됐다. 미륵사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공부의 경지가 더욱 깊어졌다.

 

정산 종사의 회고이다.

"하루는 우연히 한 가지 의심이 생기는데 그것은 숨 쉬는 것이었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고 내쉬었다가 들이쉬며, 들이쉬는 것이 밑천이 되어 내쉬고 내쉰 것이 밑천이 되어 들이쉬며, 숨을 쉬면 아니 쉴 수 없고, 또 내 쉬면 아니 들이쉴 수 없으니 이것이 어째서 그럴까 의문을 걸고 면마하였더니 우주의 이치가 이 하나에 벗어나지 아니함을 알았다."

 

정산 종사는 미륵사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대로 인연을 만나게 됐다. 원기 7년 설을 쇠고 난 정월 어느날, 비단 장수를 하는 화주보살이 미륵사를 찾아왔다. 그 화주보살은 객스님(정산 종사)을 보고 '생불님'으로 받들고 따랐다. 그 뒤 미륵사에 생불님이 계신다는 소문이 나 불공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던 (음) 이월 보름 경, 정산 종사는 더 이상 머물러 있기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며 인편을 통해 그 동안의 경과를 소태산 대종사께 보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봉래정사에서 소식이 왔다. 편지 받은 즉시 돌아오라는 글이었다. 정산 종사는 편지를 손에 쥔 채 그대로 봉래정사로 향했다.  화주보살은 생불님이 매양 한 벌 옷으로 지내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비단 솜옷을 지어 가지고 절을 찾아갔다. 화주보살이 나타나자 주지 스님은 보살이 객스님을 다른 데로 모셔갔다 하고, 보살은 주지가 다른 데로 빼돌렸다며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보살은 애통해하며 묻고 물어 봉래정사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생불님이 산에서 나무를 한 짐 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미륵사에서 차림 그대로였다.보살이 새 옷을 올리며 갈아입을 것을 청하니 정산 종사가 "사부님께서 입으라하셔야 입습니다."라고 해 보살은 생불님 위에 더 큰 스승님이 계신 줄 알았다. 그리하여 보살은 정산 종사의 연원으로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그를 보고 "방죽을 파면 고기가 모인다더니 과연 모여드는구나"라고 했다. 그가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받고 전북회상과 서울회상의 총 연원이 된 삼타원 최도화(1883~1954, 교단 제1대 내에 3백 19명을 입교시킴)이다.

 

정산 종사와 최도화의 만남은 마치 그물의 벼릿줄 같이 창립인연들이 수없이 모여드는 계기가 됐고 원기 9년 익산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직후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에서 새 회상 최초로 12제자와 1개월간 선(禪)을 나는 인연이 됐다.

이 때 11세 된 김대거가 참석하여 소태산 대종사-->정산 종사-->대산 종사로 이러지는 새 회상 3대 주법이 최초로 한지리에 만나는 역사를 이루었다.

 

자료출처: 대산종사 탄생백주년 해설사 교재에서  저자:  서문성 교무님

진묵대사와 미륵사 : 진묵은 갓 쓴 불상을 조성하여 도량에 봉안하였다. 그의 유명한 '진승(眞僧)은 하산(下山)하고 가승(假僧)은 입산(立山)한다'는 말이 있다. 생남불공하러 온 여인의 청에 칠성각 불상 머리를 때리며 "애기 낳아줘라" 하자 불공드리러 온 사람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스님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진묵일옥 (震默一玉) -원불교 용서사전에서

1562~1633 조선시대의 이름난 스님. 이름은 일옥(一玉), 진묵은 호. 술 잘 마시고 무애행 잘 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가모니불의 소화신(小化身)이라고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도 그를 여래의 경지에 오른 큰 불보살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신통묘술과 기행 이적을 많이 행하여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의 성(姓)과 부모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북 만경 불거촌(佛居村)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부모를 잃고 7세에 출가하여 전주 서방산 봉서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불경을 공부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한 번만 보면 그 깊은 뜻을 깨닫고 다 외웠다고 한다. 유가의 선비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하는데, 선비들과의 시회(詩會)에서 지었다고 하는 「천금지석산위침 월촉운병해작준 대취거연잉기무 각혐장수괘곤륜(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居然仍起舞 却嫌長袖掛崑崙)」이라는 글귀는 오늘날까지도 진묵의 호호탕탕한 기풍을 잘 나타내 주는 글귀로 전해오고 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으며 산을 베개삼아, 달빛은 촛불 되고 구름은 병풍이며 바닷물은 술통이라, 크게 취해 일어나 한바탕 신바람 나게 춤을 추고 나니, 긴소매 옷자락이 곤륜산 자락에 걸릴까 그게 걱정이네」라는 뜻이다. 술을 곡차라고 하는 말도 진묵으로 부터 유래한 말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을 걸어 힘들게 암자에 도착했다.

급경사에 그래도 오르막 길에 제설작업은 해 놓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급경사길을 오르는데 숨이 가뻤다.

암벽에 둘러 쌓인 곳에 위치한 미륵사!

정산종사님께서 대종사님의 명을 받들어 인연을 만나기 위해 오셔서 한 철을 머무시던 곳!

우리 원불교와는 떨레야 뗄 수 없는 미륵사이기에 그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외관상으로는 절이라고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 지기도 했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진묵대사가 머물렀던  진묵성지라고 씌여 있는 사찰 치고는 너무 허름하다는 생각에 우리 후손들이 잘 관리해가야 할 사찰일턴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급 경사면을 올르며

미륵사 오르막길을 넘어서는 오도재에서

 

 

 

 

 

 

 

삼면봉에서 오후에 산행을 시작한지라 늦고 바쁜 마음에 만덕산 정상은 다음 기회에 도전하기로 했다. 삼면봉은 완주 소양면과 상관면 진안 성수면이 만나는 봉우리다.  정산종사님께서 거쳐 오셨던 정수사의 푯말이 보인다.

삼면봉에서 바라보는 진안 성수면쪽 풍경: 아래로 만덕산훈련원쪽이 보이고 멀리 진안 마이산의 풍경도 들어 온다.

하산은 만덕산훈련원 방면으로 하였는데 능선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만덕산초선지 오르막 길과 만난다.

하산하여 만덕산훈련원에 도착하여

 

만덕산훈련원 교무님과 함께 한 컷!

 

만덕산은 원불교와 인연이 깊은 성지이다.

만덕산성지와 인연이 시발점이 된 미륵사가 어떤 곳인지 꼭 한 번 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산행을 하고 보니 뿌듯한 마음이 느껴진다. 몇 번 갈 수 있는 기회가 있기도 했지만 먼 발치에서만 저 곳이 미륵사구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이 번에 직접 만덕산 미륵사를 갔다 와 보았다는 데 원불교도로서 꼭 가봐야 할 곳을 갔다 왔구나 하는 자긍심이 느껴진다.

더욱이 최도화 선진님과 많은 선진님들께서 왕래 하셨을 오도재를 직접 넘어 본 감회는 갔다 와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혼자서 등산하라면 못 했을 텐데 함께 한 법연들이 있기에 가능한 산행이었습니다. 함께 한 법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