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가면을 읽고 브레네 브라운 지음 / 더퀘스트 출판
저자인 브레네 브라운은 불안, 수치심, 취약성 등 현대인이 겪는 고통의 뿌리를 연구하는 심리 전문가로 15년 가까이 오직 이 연구에 매진하면서 그간 수많은 강연의 핵심과 1만여 건의 연구 사례를 모아 책으로 엮었으며 그녀만의 독창적인 연구 결과와 심리 처방은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둔 부정적인 감정을 컨트롤할 힘과 용기를 준다. (저자 소개에서)
이 책은 8개의 챕터인데 0. 나는 이렇게 삶에 뛰어들었다 1. 네가 부족해서 그래 2. 취약성,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 3. 용기 내어 수치심 들여다보기 4. 숨을 못 쉬게 하는 마음의 갑옷 5.현실과 의상의 간극 의식하기 6. 대담하게 뛰어드는 리더가 되려면 7. 내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되길 바라는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뒤 표지에 평가한 글에 세스 고딘, 경영 구루[지금 당신의 차례가 온다면] 저자가 평한 글
‘놀라운 책이다. 시의적절하고, 핵심을 찌르고, 읽는 재미까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감동까지 있다고.
이 책에서 느낀 공감 밑줄을 소개해 본다.
p.10 우리가 완벽 또는 무결점 상태가 될 때까지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고 소중한 관계를 희생시키고, 귀중한 시간을 그냥 흘러 보내고 우리의 재능을 외면하게 된다. 오직 우리만 할 수 있는 독특하고 유익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완벽’과 ‘무결점’은 매혹적인 말이지만 인간의 경험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조건 경기장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여기서 경기장이란 새로운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중요한 회의일 수도 있고, 창조적인 작업일 수도 있고, 가족들과의 껄끄러운 대화일 수도 있다. 경기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여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관중석에 앉아서 비평과 충고를 쏟아낼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경기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취약성이다. 이것이 ‘대담하게 뛰어들기‘다.(서문에서)
p.23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선택한 삶의 지침들을 날마다 실행해야 믿음이 자라난다. 온 마음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용기와 공감과 이어짐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은 취약성을 용기, 공감, 관계의 촉매제로 인식한다. 취약해질 수 있는 용기는 내가 ’온 마음을 다하며 사는 사람‘으로 분류한 모든 남성과 여성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가치였다. 그들은 직업적 성공, 성공적인 결혼생활, 부모로서 느낀 자부심 등 온갖 좋은 일은 자신이 취약해진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p.27 마침내 책은 한 권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어떤 자리에 가든, 상대가 누구든 내 강연의 핵심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려움, 놓아버리기, 용감해지고 싶은 마음.
p.28 부모로서 불완전한 순간들은 오히려 선물이 될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고 다음번에 더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우리의 지상과제는 완벽한 부모라는 가면을 쓰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과 나중에 아이들이 용감하고 적극적인 어른으로 자라는 것은 다른 문제다.
p.38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받은 ‘좋아요’의 개수가 나의 가치를 말해주는 거야. ‘ 우리는 사회적 메시지에 취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취약성이라는 새로운 렌즈는 ’우리 vs 못된 나르시스트‘라는 구도를 설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것과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를 혼동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유명인 중심의 문화라는 잣대로 우리의 보잘것없는 일상생활을 측량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자신이 너무나 평범하고 부족한 존재라서 괴로울 때 명예와 지위와 찬사를 갈구하는 느낌은 강력한 진통제와 비슷하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그런 생각과 행동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p.41 모두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극도로 신경 쓰는 사회에서는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우리는 안정, 사랑, 돈, 자원 등 모든 것이 부족하거나 없다고 느낀다.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다른 사람이 가진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을 비교하고 따져보는 일에 어마어마한 시간을 투입한다. 끊임없는 계산과 비교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 결혼, 가족, 공동체를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비현실적일 만큼 완벽한 이미지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 역시 비교의 한 형태로 위험을 내포한다. 현재의 자신의 삶과 과거와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 생각해보자. 그런 과거는 추억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된 것일 뿐 실제와 무관한데도 말이다.
p.45 ’네가 부족해서 그래‘ 문화에 대항하는 방법은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다.’늘 부족하다‘의 반대말은 ’풍요롭다‘도 아니고 ’무한정 많다‘도 아니다. 부족함의 반대말은 ’충분함‘이다. 나는 충분함 대신 ’온 마음을 다함 Wholeheartedness‘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이를 달성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이 바로 취약해지기와 자아 존중하기다.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상처를 입더라도 감정을 드러내는 것. 지금의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p.45 지난 12년 동안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이 우리의 가족, 기업, 공동체를 억누르는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으로서 내 의견을 말하겠다. 이제 우리는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모두 용감해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대담하게 뛰어들기를 원한다.’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와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논쟁에 신물이 난다.
p.51 정말로 위험한 일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감정 자체를 나약함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견뎌내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단 분노만은 예외다. 분노는 2차적인 감정이다. 분노는 우리 내면에 있는 복잡한 다른 감정들을 가리고 숨기기 위한 사회적 마음가면일 뿐이다.). 감정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취약성을 견디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느낌과 실패를 혼동했고, 감정과 책임을 혼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취약성을 나약함과 동일시하면 한 된다는 점이 이해되기 사직한다. 삶에 반드시 필요한 감정 영역을 되찾고 열정과 목표의식에 불을 붙이고 싶다면 자신의 취약성을 끌어안고 취약한 상태 그대로 세상에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새로운 배움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잊고 있던 것을 복습하는 과정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장 좋은 출발점은 취약성을 정의하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p.56 심리학과 사회심리학에서는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와 함께 제시했다. 건강심리학 방면의 여러 연구에서도 취약성을 인지하는 사람, 곧 자신이 처한 위험과 노출 정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밝혀졌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참으로 흥미롭다.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가가 아니라 우리가 취약성을 얼마나 인정하는가가 핵심적 변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p.59 사회자가 나를 소개하기 직전에는 내 책상에 놓여 있는 문진을 생각했다. 그 문진에는 ’실패하지 않을 줄 미리 안다면 과연 그 일을 하려고 할까?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는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꺼내 새로운 질문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었다. 무대에 올라서는 순간 속삭이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실패하더라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뭘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무대 위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강연이 끝났을 때 나는 또다시 취약성 숙취에 푹 젖어 있었다. 위험은 감수할 가치가 있었던가? 당연하다. 나는 나의 학문을 사랑하며 연구 참여자들에게서 배운 것을 신뢰한다. 나는 취약성과 수치심에 관한 솔직한 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강연은 두 번 다 불완전했고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가서 최선을 다했다. 세상에 뛰어들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변화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용감해진다. 강연이 끝난 순간 나는 이것이 정말로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령 강연이 실패작이었거나 사람들의 비판이 쏟아지더라도 말이다.
p.70 모든 배신행위는 끔찍하지만, 어떤 배신은 아주 음흉하고 은밀하게 신뢰를 파괴한다. 내가 말하는 은밀한 배신이란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관계를 방치하는 것, 관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지 않는 것, 나의 연구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배신, 그러니까 신뢰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측변에서 가장 위험한 배신은 다름 아닌 놓아버리기다.
p.71 신뢰와 마찬가지로 배신도 서서히 만들어진다. 한 번에 조약돌 하나씩. 내가 앞서서 언급한 ’명시적인 배신‘ 곧 ’큰 배신‘은 대부분 일정기간 동안 놓아버리기를 하면서 신뢰를 갉아먹고 나서 생긴다. 내가 신뢰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알아낸 것과 삶 속에서 개인적으로 배운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뢰는 취약성의 산물로서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며, 노력 관심 진정 어린 참여를 요구한다. 신뢰는 거창한 몸짓이 아니다. 신뢰는 항아리에 하나씩 하나씩 채워지는 조약돌과 같다.
p.75 한때 나는 내가 잘만 하면 취약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취약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전화벨이 울리고 상상 밖의 소식을 들을 때, 뭔가가 두려울 때,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감사와 기쁨보다 그 사람을 잃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앞설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상황을 잘 관리하고 주위 사람들을 세심히 살폈다. 뭔가 느낄 에너지가 남지 않을 때까지 분주히 움직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내 마음속의 상처와 두려움을 정확하게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밖에서 보면 나는 용감한 사람이지만 나의 내면은 겁에 질린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알게 됐다. 나의 가면은 너무 무거워서 계속 끌고 다니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그 가면이 내게 해 준 것이라고는 나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진짜 모습을 알리지 못하게 숨어 있으라고 명령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불완전함과 취약성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숨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p.88 우리는 자존감을 위협받지 않을 때 훨씬 용감해지며 그럴 때라야 우리의 재능과 재주를 숨김없이 보여주게 된다. 가정. 학교. 기업에 관한 나의 연구에 따르면,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풍부한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를 부탁하고 받아들이고 피드백을 수용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적극적인 태도로 끈기 있게 뭔가를 시도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이런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훨씬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다. 자신의 가치를 자각한 사람은 쉽게 솔직해지고 취약성을 끌어안는다. 그런 사람은 시련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 반면 수치심에 젖어 있는 사람은 쉽게 위축되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겁을 먹는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화, 다시 말해 부모와 교사와 행정가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사람들에게 당신 가치는 당신의 창작물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문화의 특징은 놓아버리기. 남 탓하기. 뒷담화. 낙인찍기. 편애. 그리고 창의성과 혁신의 결핍이다.
p.91 나의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로버트 힐리커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치심은 일대일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내가 스스로 수치심을 안길 수도 있습니다.”
p.91 우리가 크게 실망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온 마음을 다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실패가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온 마음을 다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실패가 가치 없음과 전혀 다른 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실패했다고 해서 사랑받고 어딘가에 속하고 기쁨을 느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시 도전하지 못한다. 수치심은 경기장 밖 주차장을 서성이며 기다린다. 패배를 맛보고 다시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경기장 밖으로 나오면 수치심은 이런 말로 그들을 비웃는다. “내가 뭐랬어. 실수하는 거라고 했쟎아. 당신은 별로 ㅇㅇㅇ하지 못하다니까.”
수치심 회복탄력성은 그럴 때 이렇게 대꾸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은 속상해. 실망스럽고 큰 타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네. 하지만 나는 성공과 명성과 인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 나는 용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용감하게 행동했을 뿐이야. 수치심아, 그만 가보렴.”
p.93 ‘수치심 3원칙’이란 수치심에 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세 가지 사실이다. 첫째, 수치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중략) 두번재 원칙은 사람은 누구나 수치심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는 것, 마지막 원칙은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를 회피하면 할수록 수치심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p.145 수치심, 남자와 여자, 자존감에 관해 내가 배운 것들을 돌아보면 가장 큰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수치심에 빠져나와 서로에게 돌아갈 방법을 찾고 싶다면 취약성이 그 길이며 용기는 가로등과도 같다. 이런저런 사람이 되라고 지시하는 규범들의 목록을 내려놓는 것은 용감해지는 일이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진짜 우리 모습을 되찾는 과정에서 서로를 지지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멋진 도전이다.
p.149 만약 취약성의 갑옷에 관한 연극을 한 편 제작한다면, 무대는 중학교 구내식당으로 하고 등장인물은 11~13세로 설정하고 싶다. 성인들의 갑옷은 알아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갑옷을 너무 오래 입은 나머지 갑옷이 몸에 딱 맞게 굳어져 알아볼 수도 없게 됐다. 제2의 피부라고나 할까. 가면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수백 명의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두려움을 피력했다.
“이제 와서 가면을 벗을 수는 없어요. 나는 진짜 모습은 아무도 모르거든요. 배우자도 아이들도 친구들도 나를 몰라요. 그들은 진짜 나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나조차 가면 속의 어떤 사람인지 종종 헷갈리는걸요.”
하지만 10대 초중반의 청소년들은 다르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 아이들은 이제 막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어리고 예민한 아이들에게 갑옷은 아직 낯설고 몸에 잘 맞지도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아이들이 어떤 갑옷을 입고 있으며 왜 그걸 입었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아이들은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감추는 데 서투르기 때문이다. 또한 수치심과 두려움의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아이들은 갑옷이 무겁거나 가면 때문에 숨이 막히는데도 그걸 계속 착용해야 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면과 보호 장치를 거침없이 입었다 벗었다 한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잇달아 늘어놓기도 한다.
“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상관 안 해요. 멍청한 애들이거든요. 춤추러 가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모르겠죠. 근데 쟤네들 엄마한테 전화해서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뭔지 물어봐줄래요? 나도 춤추러 가고 싶은데.”
p.153 지금부터 우리가 절대 벗지 않는 세 가지 마음의 갑옷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중 하나는 기쁨 차단하기, 즉 순간적인 기쁨을 억누르는 역설적인 공포감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면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이며, 마지막 갑옷은 고통과 불편을 없애준다면 뭐든지 받아들이도록 자신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P.158 삶의 기쁜 순간들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서는 취약성이 필요하다. (중략)
취약성과 기쁨의 관계를 이해하면 답은 명백해진다. 취약해질까 봐 선수를 치는 것이다. 무방비상태에서 당하는 것이 싫어서 문자 그대로 불행해지는 연습을 하거나 자신이 만든 실망감 안에만 머무른다.
P.160 기쁜 순간에 종종 수반되는 취약성의 진동은 언제 느껴도 불편한 법이다. 자연스럽게 기쁨 안으로 들어가서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그 진동에 면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취약성을 불확실한 신호가 아니라 기쁨을 실감케 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나는 그 도구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나서 정말 놀랐다(그리고 내 인생도 달라졌다). 자신의 경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기쁨에 수반되는 취약성의 전율을 ‘감사하라’는 초대장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어떤 사람, 아름다움, 이어짐, 또는 눈앞의 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인정한다. 나의 통계에 따르면 감사는 ‘기쁨 차단하기’의 해독제였다. 연구 참가자들 가운데 기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답한 사람들은 고마워하는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런 패턴이 통계에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로서 기쁨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고마움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P.162 부족함의 반대말이 충분이라면 고마워하기를 실천하는 행동은 지금의 우리로도 충분하며 지금의 상황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실천’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쓰는 이유가 있다. 연구 참가자들은 단순히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거나 감사를 느끼는 것은 넘어서서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감사일기 쓰기, 감사의 유리병 만들기, 가족끼리 감사 의식 거행하기와 같은 것들 말이다. 감사의 실천에 대해, 그리고 취약성 속에서 나타나는 부족한 느낌과 기쁨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들은 슬픈 이별이나 트라우마를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 시한부 선고를 받은 가족을 둔 사람, 학살이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 내가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취약성에 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이 힘들었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선생님도 덩달아 우울해지지 않나요?”
나의 대답은 ‘아니요’다. 절대 그렇지 않다. 연구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보다 자신이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준 용감한 사람들에게서 자존감, 회복탄력성, 기쁨에 관해 많은 걸 배웠기 때문이다. 슬픔과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에게 기쁨과 빛에 관해 배우면서 나는 세가지 교훈을 얻었다. 지금 나는 이보다 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첫째, 기쁨은 순간(대개는 평범한 순간)에 찾아오는 감정이다.(중략) 둘째, 지금 가진 것을 고마워하라. (중략) 셋째, 기쁨을 아깝게 흘려보내지 마라.
P.169 완벽주의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분명 기나긴 여정이 될 것이다. 출발점은 수치심 회복탄력성, 자기 자신에게 공감하기,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지 진실을 포착하고 삶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 (중~략) 텍사스대학 오스틴 캠퍼스 교수인 그리스틴 네프 박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향한 공감을 키우고 실천하는가를 연구하는 ‘자기공감 연구실’을 운영한다. 네프 박사에 따르면, 자기공감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자기를 향한 친절, 보편적인 인류애, 그리고 마음챙김. (중~략) 네프 박사의 ‘마음챙김’ 정의가 마음에 든다. 네프 박사는 마음챙김이란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지도, 과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경우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후회나 수치심이나 자기비판에 쉽게 사로잡힌다. 하지만 자기공감을 하려면 수치심이나 고통을 느낄 때도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P.171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무조건 행복할 것>>의 저자인 그레첸 루빈과의 인터뷰다. <<무조건 행복할 것>>은 그녀가 행복해지는 법에 관한 책과 논문들을 읽고 1년 동안 실행해본 기록이다. 완벽주의를 제어하는 법에 관해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요. ‘완벽이 좋은 것의 적이 되게 놔두지 말자.’ 철학자 볼테르의 말을 빌려온 거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20분간의 산책이 내가 좀처럼 하지 않는 7킬로미터 달리가보다 낫지요. 세상에 출간된 불완전한 책이 내 컴퓨터를 떠나지 못하는 완벽한 책보다 낫고요. 테이크아웃 중국음식으로 여는 디너파티가 내가 한 번도 마련하지 못한 근사한 저녁식사보다 낫잖아요.”
P.184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사랑과 소속감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해서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단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 결론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사랑과 소속감을 충만하게 느끼고 싶다면 자신이 사랑받고 어딘가에 소속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믿어야 한다.
P.190 나의 연구에 따르면 바른 정신은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꼭 종교를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큰 어떤 힘에 의해, 사랑과 연민에 기초한 어떤 힘에 의해 서로에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바로 바른 정신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신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연, 예술, 또는 사람의 정신일 수도 있다.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취약성을 받아들이고 마비를 이겨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P.199 연구 참가자들 가운데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온 마음을 다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를 인정하고 전문가의 도움이나 지원을 요청하는 것, 수치심을 극복하고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 그리고 취약성과의 화해를 생각만 하지 말고 날마다 실천하는 것! ‘온 마음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과의 인터뷰에서는 늘 바른 정신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특히 자신을 단순히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참가자들이 이를 강조했다.
P.222 종교 역시 사회계약 불이행의 한 예다. 놓아버리기는 대개의 경우 리더들이 자신들이 설교하는 가치들을 구현하며 살지 않는 결과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는 종종 절대적인 것을 희구한다, 그것은 두려움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미지의 대상과 맞서는 방법과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치면서도 모범을 보이지 못할 때, 우리의 두려움과 확실성에 대한 욕구를 자기들에게로 대체할 때 신앙의 개념은 스스로 무너진다. 신앙에서 취약성을 빼버리면 정치만 남는다. 최악의 경우에는 극단주의 정치가 될 수도 있다. 영적 유대와 참여는 순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소속감과 취약성의 산물이다.
P.228 앞으로 우리는 리더로서, 부모로서, 교육자로서 낯설고 불편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다.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우리의 가치와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력하면 된다. 또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렘린들이 역량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공격할 테니까. 그렘린들은 우리가 경기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취약성을 끌어안고 기회를 포착하는 순간 슬금슬금 기어나오기를 좋아한다.
P.236 비난 뒷담화 편애 욕설 괴롭힘과 같은 행동은 모두 수치심이 조직문화에 침투해 있다는 징후다. 공공연하게 수치심을 관리의 도구로 쓰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리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동료들 앞에서 아랫사람을 비판하고 꾸짖는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기죽이거나 모욕하거나 수치스럽게 만드는 보상체계가 만들어져 있는가? 나는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는 학교 또는 기업을 본 적이 없다.
P.245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개인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직문화에서는 수치와 비난이 관리의 도구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곳에는 두려움에 의존하는 리더십이 없다. 공감을 귀중한 자신으로 여기고, 책임은 예외가 아닌 기본으로 여기며, 소속을 향한 사람의 원초적인 욕구를 통제의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 사실 개개인의 행동을 통제한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가장 귀중한 존재인 사람을 보호할 책임을 지고 모욕적인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창의성, 혁신, 적극적인 배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수치심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가 불편하다고 해서 우리의 학교와 직장에서 수치심을 인식하고 싸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높은 조직을 만드는 4단계 전략이다. 먼저 대담하게 뛰어들려는 리더들, 수치심에 관해 솔직한 대화를 확산시키고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높은 문화를 만들려고 하는 리더들을 지지한다.
P.247 피드백이 꽃피는 조직문화란 껄끄러운 대화를 편하게 나누는 것을 넘어 그 불편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내할 수 있는 문화다. 리더들이 진짜 배움과 비판적 사고와 변화를 바란다면 불편은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성장과 배움은 원래 불편한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성장과 학습이 이뤄질 테고 여러분은 당연히 불편을 느끼겠죠. 이곳에서는 불편한 게 정상이고 표준이라는 점을 아셨으면 합니다. 나 혼자만 불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귀를 열어놓고 불편에 적응하세요.’ 이것은 학교 종교단체 가정 등의 모든 조직과 상사가 들어야 할 이야기다. 나는 그동안 ‘온 마음을 다하여 운영되는’ 조직들을 연구하면서 ‘불편의 표준화’라는 패턴을 발견했으며, 나의 교실과 가정에서도 불편함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P.251 사람들이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무장을 하는 것이다. 피드백을 주거나 받을 때의 취약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으르렁거릴 준비를 한다. 얼핏 생각하면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지는 사람은 피드백을 받는 쪽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대치와 행동에 관한 솔직한 대화는 언제나 그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불확실성과 위험을 떠안기고 감정 노출을 요구한다.
p.252 솔직히 말하면 나도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는 기질이 있다. 공격적인 논쟁을 곧잘 벌이고, 때로는 생각하기도 전에 말을 뱉는다. 나의 감정들은 제멋대로 증폭되곤 한다. 나는 쉽게 화를 내지만 취약성을 끌어안는 능력은 그저 그렇다. 그래서 취약성의 경험이 내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전에 얼른 갑옷을 입곤 했다. 다행히 이 연구를 하면서 내가 독선적으로 행동한다 싶을 때 사실은 뭔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자적인 행동은 나 지신을 보호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내가 틀리거나 누군가를 화나게 하거나 비난받을 일이 두려워 거만하게 굴었던 것이다.
p.262 리더들의 입장에서 취약성은 불편해 보이거나 불편하게 느껴진다. 세스 고딘은<<Tribes: We Need You to Lead Us>>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한 리더십이 드문 이유는 사람들이 리더십에 따르는 불편을 감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리더십은 드물기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높다. (…….) 낯선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실패할 확률이 있는데 아이디어를 낸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현재 상태에 도전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욕구를 거스르는 것도 불편한 일이다. 그 불편을 인식할 때 당신은 리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다. 만약 리더로 있으면서도 불편하지 않다면 당신은 리더로서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p.271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환경적 영향을 받기도 한다. 몇 퍼센트가 유전적 요인이고 몇 퍼센트가 환경적 요인인지를 마음대로 추측할 수 없고, 두 가지 요인의 정확한 비율을 계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사랑과 소속감과 자존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했던 경험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p.273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이 우리의 목표라면, 우리는 아이들을 다음과 같이 키우기 위해 힘써야 한다.
. 자존감을 토대로 세상에 참여하는 사람
.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사람
.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깊은 사랑을 느끼고 공감하는 사람
. 노력과 인내와 존중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 진실함과 소속감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어서 외부에서 찾지 않아도 되는 사람
. 불완전하고 취약하고 창의적 존재가 될 용기를 지닌 사람
. 자신이 남과 다르거나 곤경에 처했다는 이유로 수치스러워하거나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
.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용기와 회복탄력성으로 헤쳐 나가는 사람
p.275 나는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이 북극성과 비슷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는 영원히 북극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는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그 길을 걸으며 시련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P.277 완벽주의는 전제조건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10년이 넘도록 자존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완벽주의에 전염력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만약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남의 눈에 완벽해 보이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고 있다면, 차라리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완벽’이라는 이름의 구속복을 입히는 게 나을 것이다. 완벽주의는 아이들에게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과 다르다. 그들 자신의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완벽주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보다 남들의 생각을 더 귀중하게 여기라고 가르친다. 연기를 하고 남을 기쁘게 하고 자기 가치를 입증하라고 가르친다. 그런 일은 나의 삶에도 적지 않았다.
P.283 사람의 뇌는 타인에게 거부당한 경험이나 수치심 경험을 육체적 고통과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아이들이 수치심을 트라우마로 받아들이고 뇌에 저장하는 가설을 뒷받침할 통계가 언젠가 나오겠지만, 지금도 나는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수치심은 우리의 성격과 자아상과 자존감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P.285 내가 인터뷰한 어른들 가운데 수치심을 육아의 도구로 자주 활용했던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수치심을 가끔 경험하고 그것을 부모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낮았다. 당신의 자녀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그래서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기르거나 사진첩을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답은 ‘아니요’다. 늦지 않았다. 이야기(힘든 이야기도 포함)의 주인이 되자. 그러면 우리가 이야기의 결말을 직접 쓸 수 있다. 몇 년 전 나는 어느 여성 독자에게 이런 편지를 받았다.
선생님의 연구는 아주 신비로운 경로로 제 인생을 바꿔놓았답니다. 우리 엄마가 아마릴로에 있는 교회에서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거든요. 강연을 듣고 나서 엄마가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 편지에는 ‘수치심과 죄책감이 다르다는 걸 몰랐구나. 어쩌면 내가 너에게 평생 잊지 못할 수치심을 심어줬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죄책감을 느끼기를 바랐어. 하지만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단다. 네가 했던 선택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데도 내가 너에게 창피를 줬구나. 지난 일들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단다. 너를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었고, 나는 네 엄마로 산다는 게 자랑스럽단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일흔다섯이고 제가 쉰다섯 살이거든요. 그 편지가 제 마음을 치유해줬어요. 그날부터 모든 게 달라졌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로 달라졌어요.
p.292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침대 모서리 앉은 엘렌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너무 걱정이 된 나머지 엘렌의 방에 따라 들어오면서 불 켜는 것도 잊어버렸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앉아 울고 있는 딸아이를 보고 있자니 내가 취약해지는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등을 켜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마음이 어느 정도 가시면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문구가 생각났다. 어둠과 공감에 관한 페마 초드론(미국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티베트불교 승려-옮긴이)의 말이었다.
‘공감은 치료자와 부상자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대등한 관계에서 생겨난다. 우리 자신의 불행을 잘 알아야 타인의 불행에 함께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니는 공통성을 인식할 때 공감은 진짜가 된다.’
p.298 예전에는 나도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연구를 하면서 얻은 지식들이 나의 관점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나는 부모의 개입과 구조를 무익한 것을 넘어 위험한 것으로 본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여전히 초연해지지 못했고, 여전히 개입하지 말아야 할 때 개입하곤 한다. 다만 이제는 어떤 행동에 돌입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희망은 시련의 결과물이다. 우리 아이들이 아주 크고 높은 희망을 키우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힘들어할 기회를 줘야 한다. 물론 사랑과 소속감도 같이 줘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희망찬 마음을 가져준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p.299 평생 희망이라는 주제를 연구한 스나이더는 희망이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희망은 사고의 방식 또는 인지의 과정이다. 감정이 우리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면 희망은 목표. 경로사고. 주도적 사고로 이뤄지는 사고의 과정이다. (중~략) 결론적으로 희망이란 목표를 세우고 인내와 끈기를 발휘해 그 목표를 계속 추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플랜B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 곧 플랜B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대목은 따로 있다. ‘희망은 학습하는 것이다.’라는 구절! 이 구절 덕택에 나는 나의 취약성을 끌어안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아이들이 자기 일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놓아둘 수 있었다. 스나이더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에게서 희망을 배운다. 아이들이 희망적 사고방식을 배우려면 적절한 경계선과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지지해주는 관계가 필요하다. 희망을 많이 가진 아이들은 시련을 검험한 적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고생할 기회를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믿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이들을 희망에 찬 사람, 그리고 취약해질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한 발 뒤로 물러나자. 아이들이 스스로 실망을 경험하고, 갈등을 해소하고, 주장을 펼치는 방법을 배우고, 실패할 기회를 얻도록 해주자. 우리가 번번이 아이들을 따라 경기장에 들어가서 비평가들을 잠재우고 아이들이 승리하게 해준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혼자 함으로 대담하게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P.309 대담하게 뛰어들기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용기를 낸다는 것이다. 부족한 느낌과 수치심이 우리를 지배하고 두려움이 제2의 본성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취약해진다는 것은 커다란 도전이다. 마음가면을 벗고 우리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상처를 입을 확률은 높아진다. 하지만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대담하게 뛰어들기’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가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삶의 바깥쪽에 서서 삶을 들여다보기만 하면서, 진짜 나를 보여줄 용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궁금해 하는 것만큼 불편하고 위험하고 상처가 되는 일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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