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이 책의 저자 유발하라리는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태어나, 200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세계사 연구는 유튜브 등의 동영상을 통해 알려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전세계 8만명 이상이 그의 수업을 듣고 있다. 그의 저서 사피엔스는 처음 이스라엘에서 출간되어 세계 각국 30개 언어로 출간되어 전세계적인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저서는 인류학, 사회학, 생물학 등 분야를 넘나드는 폭 넓은 안목으로 인류의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더 행복해졌는지 등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저자의 불교에 대한 인식론 부분이다. 불교문화권이 아닌 기독교문화권에서 바라보는 불교, 서양의 문화권에서 바라보는 불교라는 점에서 우리와는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그 내용을 첨삭하지 않고 옮겨 본다.
「p.557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거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 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는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전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위 글에서 작가는 불교적인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행복과는 무관하다고 보며 주관적 느낌에 집착할수록 괴로움도 심해진다고 보고 있으며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데 있다고 보고 있다. 작가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런면에서 우리는 `해탈`이라는 감정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추구해서 얻고자 한다. 그러나 평생해도 한 번도 그 느낌에 도달할 수 없거나 느낀다 해도 잠시의 지나가는 감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정한 감정을 위하여 평생을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역사적으로 성인들의 삶을 돌아보면 한 사람의 깨달음이 얼마나 세상을 크게 빠꿔 놓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고 그것을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는 것이 작가의 말과 같이 파도와 같고 자유롭게 오고 가게 놔두는 것이 더 평화롭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에서 더 유의미한 일에 매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기존의 가치 체계에서 본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가는 행복론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데 있을지 모른다고 진단하고 있다. 집단적 환상이라면 개인적이 아닌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이상세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행복론(19.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에서)에 대한 견해의 글들을 살펴본다.
p.532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p.535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p.536 철학자, 사제, 시인들이 행복의 본질을 수천 년 간 곰곰이 생각해온 결과, 그들은 우리의 사회적, 윤리적, 정신적 요인들도 물질적 조건만큼이나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지었다.
p.542 만일 행복이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대중 매체와 광고 산업-은 지구의 만족 저장고를 생각지 않게 고갈시키는 중일 수도 있다.
p.547 행복이 `주로` 생화학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심리학적, 사회학적 요인의 영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적 온도조절 시스템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p.553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p.553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저자 스스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서 가장 큰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와 같이 인류사를 꿰뚫는 통찰과 거시적 안목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불행하게도 호모사피엔스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기를 넘어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되려 하고 있으며 불멸의 존재가 되려 하고 있고 실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p.588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족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시간을 들여 꼭 읽어 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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